도스또예프스끼와 브리꼴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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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와 브리꼴레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죄와 벌』의 원어는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이다. 죄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동사는 목적어에 따라 ‘(문지방)~을 넘다’ 혹은 ‘(규범)~을 어기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름은 Раскольников. ‘정신이 분열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부분의 러시아작가들은 케릭토님이라는 기법으로 작품 제목,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의도된 함축의미’를 내포한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는 “분열과 간극”을 가진 자로 “경계를 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격리된 인물”이라는 함축의미를 갖는다. 초인사상이라는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위해 도덕적, 종교적인 경계선을 뛰어 넘어버린 자, 라스꼴리니꼬프는 경계선과 관련된 독백을 내뱉으며 제 존재를 온몸으로 비튼다.

“나를 밟고 넘어 설 수 있느냐, 없느냐?”

분열로 생겨난 간극의 경계선에 대한 의미의 전형,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 그들을 우리 시대에서 다시 만났다. “브리꼴레르”가 되어.  

아픈 만큼 성숙한다 했다. 과연 우리는 얼마큼 아픈가? 왜 아픈가? 혹은 ‘진정한’ 아픔을 겪어보긴 했는가? 성숙은 경계를 넘어야 한다. 경계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편, 저편을 구분 짓고 여러 외부자극, 저항요소로 인해 어느 한 편으로도 ‘온전히’ 속할 수가 없다. 사이의 경계가 있어 사이 안 쪽 세계에 대한 시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면, 이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계, 그것은 넘어야만 존재로써의 가치를 인정받는 ‘기회’일 수 있다.

경계 밖, 사이의 간극, 내가 갇힌 알의 감옥 밖의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성숙되어야 할까? 무한 창조 가능한 세계의 오브제를 찾는 방법, 답은 “브리콜레르적 상상”에 있다. 상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What to do”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한 능력이 창의력이라 했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선택하고 선택되는 모든 매체에서 얻는 상징적 insight를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브리꼴라주”-불어로 ‘손재주,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를 해야 한다. 단연 편집의 시대이다. 어설픈 편집이 아닌 예술적 편집. 화려함은 덤이다. 기본은 미덕을 갖추는데 있다. 상상으로 촉발된 창의력이 현실이 되는 편집의 귀재로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경계 너머로 전진할 수 있다.

복제물 안의 복제물이라는 플라톤의 ‘시뮬라크르’ 정의에 브리콜라주를 시도한 브리콜레르적 철학자 들뢰즈에 따르면 원본의 성격을 부여 받지 못한 복제물을 시뮬라크르라 했다. 최초의 모델에서 시작된 복제가 자꾸 거듭돼 나중에는 최초 모델과의 연관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뒤바뀐 복사물을 의미한다. 오리지널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을 뛰어넘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가는 역동성과 자기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브리콜레르는 분명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경계를 넘나들며 창조력의 상상으로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고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WOW’가 튀어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역발상이든, 자아를 보기 위한 낯선 거울을 드는 것처럼.

도스또예프스끼는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주인공에게 브리콜레르의 거울을 들려주었다.

“ 2 X 2 = 5 ”

지하생활자는 “세계는 반드시 수학공식인 ‘2 X 2 = 4’라는 법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2 X 2 = 5’ 가 되는 세계가 있다”라는 주장을한다. 전자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의 세계요, 후자는 비합리주의의 세계이다. 합리주의자들의 지식모델은 논리적 수학 체계처럼 두 요소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바로 명백한 공리와, 그것을 토대가 되는 연역이다. 여기서 연역적 지식체계에서 공리주의적 진리의 역할을 하는 지식이 어떤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과연 연역적 사고의 산물, 논리·수학적 지식이 우리의 ‘참지식’인가? 안타깝게도 인간의 욕망은 논리, 수학적 진리를 거절한다. 바로 브리콜레르의 욕망은 논리에 정확히 맞춘 선형적 태도가 아닌 지금-여기에서 체득하는 실존적 진리를 더욱 갈망한다. ‘2 X 2 = 4’의 세계에선 ‘다름’과 ‘틀림’의 간극을 이해할 수 없다. 틀린 것은 죄악이며 다른 것은 소외의 원인이 될 뿐이다. 브리콜레르는 ‘2 X 2 = 5’의 세계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재해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관점에 ‘해불양수’ 적인 시각으로 나신과 타인을 바라보는데 있어 인식과 관심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사고하고 계산하는 인간 능력이 아닌 상상으로 창조하고 직접 경험하여 생각지도 못한 창발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를 즐기는 ‘우리들’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욕망이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브리콜레르가 되기 위한 Mind Start Line에 선 것이다.

러시아문학 안에는 ‘사이’에 대한 성찰이 곳곳 녹아있다. 러시아는 오랜 시간 동안 서양과 동양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고민해왔다. 러시아 작가, 사샤 소콜로프의 『개와 늑대의 사이』를 보면 등장인물들의 다면성이 굉장히 ‘브리꼴레르’적이다. ‘사이’에 대한 고찰을 담은 러시아 문학작품으로썬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그의 철학을 통해 우리시대 경계를 넘나드는 도전과 야생적 사고로 무장한 실천적 지식인, 브리콜레르의 본성과 존재 이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가능성을 열어보았다. 이제 우리는 END에서 AND가 될 경계에 서있다. 그토록 다음의 AND를 보고 싶다. 경계를 넘을 준비가 되었는가?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혼란의 시공간,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브리꼴레르 –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말하라. “경계선을 뛰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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