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작업, 체홉

그냥 읽는 것과
원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며 읽는 것은 다르다.
2014, 가을학기 대학원 수업에선 체홉을 읽는다.

예전 상트의 넵스키, 돔끄니기에서 체홉의 전 작품이 모아져 있는 원서를 샀었다.
그 하드커버의 반짝이는 디자인과 러시아 냄새가 나던 종이의 그 책을 기억한다.
지하철 짐 칸에 두고 내려 영영 찾지 못했다.
멋모르던 학부 시절, 나는 모르고 체홉을 만났고
이제는 좀 알 것 같은 시대에 그를 다시 만난다.

정말 즐겁다.
문학을 하는 것은,
문학을 읽는 것은
그리고 문학을 가슴으로 만나는 것은.

본론으로 들어와 체홉에 대한 짧은 개관은..

시대를 따르지 못한다고 해서 절대 불운한 것은 아니라는 것.

포스트모던 시대에 포스트모던식의 문학을 한다면 그럴 수 있다. 여기서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은 주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포스트모더니즘식의 변형적 사고를 했다면 그것은 Mirski 가 체홉에게 했던 “사상이 없고, 철학적명제도 없다” 라는 아쉬운 비평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체홉은 진정 진실하다. 작가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얼마나 진실했냐면 시중에 나와있는 번역본과 비평서로 알 수 없다. 그의 원문을 직접 읽어야 한다. 강의는 체홉의 원문을 읽는 것을 업으로 한다. 그를 읽어 내려갈 때 만나게 될 그가 기대된다.

문학작품을 대할 때 우리는 머리와 가슴으로 뭔가를 느낀다. 작품으로부터 오는 그 무언가가 보내는 신호에 젖는다. 그것이 문학성과 예술성이다. 체홉이 얼마나 혼자서, 조용히, 울고 있었는가 문학성과 예술성을 세 가지 관점으로 접근해본다. 테마 중심, 구조시학 중심, 미학의 관점으로 살핀다.

관리의 죽음, 뚱뚱이와 홀쭉이, 카멜레온, 휘어진 거울, 농담, 우수를 읽고 나의 고유한 정의를 내려본다.
시점과 성격화에 대해. 그것은 다음 포스팅에…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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