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하는 시

행위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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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로 해야 겠다, 라는 생각이 든 것이 아마 올해 여름이었을 것이다

시를 쓰면서 시가 점점 인식의 산물로 제 둥지를 틀고 있더라. 물론 개인의 인식의 산물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제 몸을 부풀려 막대한 권한을 휘두르는 것 처럼 개인의 세계에 굉장히 거대하게 자리잡아 있었다. ‘시’라고 하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고 개인의 세계를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 마치 세계를 말하기 위해 군림하는 묵직한 장신구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와 내가 대면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가 아닌 ‘시를 쓰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타성에 의한 힘에 의한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하고 뭔가 ‘있어보이는’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시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닌데, 느껴야 하는데. 아 느껴져야 하는데, 하는 외침을 듣고자 한 것이다

그 외침의 결과물이 바로 <행위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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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하는 시>는 시를 쓰면서 고민했던 것들로 부터 출발했습니다.

과연 시는 ‘읽히는 것’인가? ‘읽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도 아닌 어떠한 감각의 총체인가?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일종의 실험서입니다.

시는 인식이 아닌 감각적 행위임을 말하고자

아주 작은 책을 적은 수량, 8페이지의 접지 형태의

아코디언 북으로 출판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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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책 형태가 아닌 책을 만지는 순간부터 감각할 수 있도록 접지의 형태를 선택했고 처음 해본 편집디자인이 아주 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말하고자 하는 텍스트를 담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리플렛 같아 보이지만 접어가고 펴가는 과정에서, 그 속에 적힌 글들을 읽어가며 약간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시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시를 쓴다는 것이 특정한 향유 행위가 아닌,

그저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서 느끼는 감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종이를 접고 피며 보이는 것들을 ‘읽는’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에게 ‘시’라고 이름 붙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입문의 etroyj@naver.com

가격 : 배송료포함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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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가 아닌 것의 경계를 찾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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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용어는 무엇인가

미술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확장된 동시대 미술에서는 미술-비미술의 경계를 묻는 일 자체가

예술행위가 되기도 하며 어떤 작품의 겉모습이나 재로, 제작방식이 미술-비미술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메리 앤 스타니체프스키, 현실문화)

위 작품은 예술의 사전적 의미를 문자 그대로 보여 주고 그것을 ‘텍스트’로서 환원, 확대시키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박제’되어 있는 작품을 예술이라 볼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철학자들이 언어예술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시는,

본질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누구나 그렇다고 합당하게,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원의 존재’인데

시는 그렇다면 언제까지 종이라는 질료 안에 각인된 글자로만 보여질 것인가.

누군가 들춰주지 않는 한 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닫힌 말로 남을 것인가.

그리고 시 밖으로 나온 ‘시’를 시라고 부르지 못하는 세계에 시는 과연 어떻게 부딪힐 수 있는가

나의 목적, 시라는 예술의 ‘근원’을 찾아보려는 작업. 시와 시가 아닌 것의 경계를 찾는 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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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8월부터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의 열정에 오히려 감사하다.
화요일 진행하는 문학 셀프멘토링 수업에
한 주 결석에도 그렇게 안타까워 하시고
오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 하셨다 하시고
“선생님을 만나서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라고 최고의 칭찬을 해주신다.

나는 얼마나 작은가.
대신 희망은 컸다.
내가 타자의 삶에 조금이라도 새로운 생기가 되길 바랐었다.
문학이, 나의 강의 컨텐츠가 그런 ‘존재’로 남기를.

이제 반 정도 달려온 지금
나와 함께 하는 화요일의 ‘우리들’은 나의 강의목표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여기’에서 하고 싶은 것을 적기 시작했고,
내 안의 나를 진짜 나라는 존재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나를 사는 나를 발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하고 싶던 무언가와 이루고 싶던 꿈과 새롭게 생기게 된 오래지 않을 미래의 꿈을
바로 보기 시작했다.

조금씩 달라지는 그들의 변화가 눈에 비친다.
이게 내가 문학하는 이유이다.
우리네 삶의 총체에서 나는 파편에 불과하나,
그 파편의 전체를 전제하므로 우리들의 총체에 파문을 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들 편에 서 응원한다.
그분들이 내게 고마워하고 감사하다,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주실 때마다 나 역시 ‘지금-여기’에서 나로서 바로 선다.

열어두고 멀리 보는 이유

호퍼

내가 하는 학문과 근근히 하고 있는 강의는 절대 작품에 대한 독자의 판단을 규정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절대로 이 작품은 이러 이러한 특징과 주제, 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라고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에룬다. 쓰레기다. 대한민국에 그렇게 강의하는 강사분들이 많으니까. 그분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문학은. ‘자아’가 사유하는 것으로 (욕망 덩어리인 ‘나’가 사유하는 것이 아닌- 그런 ‘나’는 사유할 수 없다) 그 사유대로 빛을 발하며 자아가 발하는 빛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삶에 대한 절대 기준을 알게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은 분명 되돌려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허영의 전시장에서 쓰이는 명예나 돈, 뭐 그딴게 아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과 자신감이다. 나는 분명 이렇게 믿는다.
때문에 내가 어떤 작품에서 뽑아 온 주제는 이 전체에 대한 것이예요.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폭력이다. 타자에게 작품을 읽을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문학의 상상력을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럴 권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열어두고 멀리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더라.

8, 9월 그리고 10월 첫 주까지의 거창한 이름으로 시작한 강의들이 진실로 내면의 자아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문학의 목적임을 일깨우기 위한 나의 강의가 이제 조금씩 사람을 변하게 하고 있음을 느낀다. ‘내 안의 자아를 만나 변화된 빛’을 발하는 그녀들(강의 참여자)을 보면 그 뿌듯함과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가 벅차다. 날이 지날 수록, 더욱 열심히 참석하는 그네들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 문학이 흐르는 순간이며 온 자아들이 형태 밖에서 춤추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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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이유

아뜰리에

toutedu를 만들어서 문학을 통해 삶과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지내고 있다
문학예술프로젝트를 홀로 시작했다. 끝도 없는 프로젝트.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문학은 사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 온 정신이 오롯이 담긴 작가를 읽으면서
그들의 예술에 내가 벌거벗을 때면
문학과의 대화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져 이토록 처절해진다

그래서 나름의 겸손함으로 가능한 많은 분들과 함께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겸손의 뿌리가 소통의 창에 뿌리내려
보다 많은 사람이 문학을 사랑할 수 있게
보다 자주 시를 읽을 수 있게
내가 문학을 하게 하는 힘,
보다 나로서도 문학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이 더욱 필요하다
많은 도움과 함께 하고 싶다
누구나 함께하길 기도한다
겸손으로 그리고 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