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로의 데미안 (10.7, 10.14일 강의)

내게 헤세의 데미안은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 어떤 책보다 중심을 가르쳐 준 나의 넘버원.

데미안으로 강의를 곳곳에서 하는데도
늘 새롭다. 타자는 늘 다르고, 지금-여기의 상황도 늘 다르니까
순간, 맞닥뜨린 작품 자체는 항상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한다.
체험 이후에는, 대면 이후에 얻는 질문은 특정 의지를 낳게 함을 믿는다
데미안은 내게도, 타자에게도 그렇다.

10월 7일과 14일에는 데미안을 읽었다.
수업 중, 사이에 떠돌던 공기가 몰입으로 침잠하더니
그 속에서 반짝이는 의지로 변화해 부유했다.

나의 세계에는 어떤 파편이 있는가.
데미안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나의 알은 깨질 수 있는가, 혹은 그럴 수 없는가.
등의 이야기.

그렇게 조금씩 화요일의 문학셀프멘토링에 함께하시는 분들은
날개를 갖고 알을 깨며 자신의 신에게로 날아간다
이제 나는 여기에 조금 더 큰 날개를 달아 많은 곳에서 쓰임 받기를 기도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강의 (9.30)

9월 30일에 예술가의 집에서 진행했던 9월, 여자 고전을 말하다의 마지막 강의는
뒤라스의 을 통한 ‘나’의 발견이었습니다.

강의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과 무의식과 나 사이
‘사랑’과 ‘끌림’의 사이
‘사이’의 개념
자신이 생각하는 각자의 ‘사이’ 개념
시간, 공간, 관계에 대한 깊고 다양한 ‘사이’의 이야기로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해보자
  1.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랑’과 ‘끌림’이라는 감정에 대한 토론

  2. 여자에 대한 총체적 접근, 그리고 ‘나’

단조로운 ‘한 가정의 엄마’에서 ‘두근거리는 삶’의 떨림을 기대할 수 있기를.

에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인 ‘욕망’의 관점을
내 안의 ‘그녀’ 혹은 ‘나’의 목소리에 대입하여 그것의 정체성을 스스로 탐색했던 시간.
‘나’라는 정체성은 내게 그토록 ‘낯설게’ (안나 카레리나처럼)
‘관계를 통한 타인으로부터 ‘ (쿤데라의 샹탈처럼)
‘자조적 의지로부터’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그리고 내 안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욕망의 그것으로부터 (연인)
여자를 말하고, 엄마를 말하고, 아내를 말하고, 온전한 나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9월 강의까지 마치고 이제 10월의 강의 테마는 ‘멘토’입니다.
내 삶의 멘토로서 나는 자신감있게 우뚝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추가 접수를 도서관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해오름도서관 (서울 성북구) 에 문의주시면 됩니다.
문체부주관, 한국도서관협회 주최 내생애첫작가수업, 문학을 통한 셀프 멘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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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함께사라지다, 마거릿미첼 강의 (9.25)

9월 25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강의는
작품 속 ‘스칼렛’의 목소리에 나의 목소리를 대입하는 구성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대부분 참가자가 ‘여자’인 특성이 있어 보다 감성적으로 공감하며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스칼렛의 목소리를 통해 ‘나’, ‘여자인 나’로서의 삶을 거리두기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ㅅ’의 시학에 대한 사유를 제시했습니다.

수업시간에 활용한 영상을 업로드 하려고 했는데,,
이게 왠걸. 워드프레스는 영상을 올리려면 추가로 돈을 내야 하는 사실,,
텀블러는 아닌데..

셀프멘토링0925

밀란쿤데라 강의 (9.23)

9.23일 문학을 통한 셀프 멘토링 강의

  1. 관점의 방점찍기
  2. 밀란쿤데라 읽기
  3. 정체성 (identity)의 근원에 대한 문제 의식
    그것은 과연 나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혹은 타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셀프멘토링9.23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존재자와 현존재, 세계의 건립에서
인간의 실존을 논하는 무거운 쿤데라의 주제의식이다. 과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 근원은 무엇인가
샹탈의 변화와 장마르크의 변화에 어떤 곳을 방점으로 찍을 것인지,
정체성이란 존재와의 분리가 아닌, 파편화된 총체성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전체를 염두한 파편은 현대성의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우리 모두의 근원에서 출발했음을 언급했던 시간
그렇기에 ‘나’는 카멜레온처럼 다른 ‘모양’의 정체성을 ‘하나’이상으로 가지고 있음을 인지해야 하며
그것으로 ‘혼란스럽지’않기를. 그것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사건’ 그 자체이니까.

리스본행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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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없는 집중, 고정할 곳이 있는 시선, 저 밑의 울림. 그것이 내가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혼자 찾는 독립영화관에서는 영화가 끝난 후 같은 공간에 영화에 대해 즉석에서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테지만, 엔딩크레딧을 천천히, 충분하게 읽고, 공유의 감동에 대해 박수를 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아트’에 관한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 원어의 아름다움이 조금 묻히는 게 언제나 흠이다. night train to Lisbon.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급’ 떠나게 된, 그리고 리스본에서 일어나는-‘일종의 관계에 대한 비밀을 찾아다니는’- 이야기. 그 안의 옴니버스로 연출된 ‘언어의 연금술사’ 책의 작가 ‘아마데우 프라두’에 대한 이야기까지. 독립영화 치고 대사가 많아 마치 상업과 예술의 그 사이에서 애매한 시선을 두게 했지만, 한시도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할 정도로 스크린에 몸을 바짝 기대었다. 정말 재밌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딱, 그런 영화였으니 더이상 어떤 말이 필요한가. 훌륭했다.

영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지나온 과거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입장”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과거와 현재의 주인공들이 그들의 의식공간 안에서 “과연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를 강렬하게 질문한다. 신과 우주에 대한 일종의 유신론과 무신론의 입장으로 확대될 수 있는 철학적인 담론도 영화가 끝난 후 한바탕 가능할 정도다. 현실에 침잠되어 있는 ‘보통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인생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특별한 계기) 새로운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을 먼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일상’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려놓을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늘 새로운 삶을 갈망하고, 열망할 뿐이다. 그러다 무언가에 이끌려 -이것을 조절하는 힘은, 아마도 생각지도 못하게 이끌린 힘 같은 것일 테다 – 어느날 기차를 타 버렸다.

기차라는 장치는 문학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공간의 연결고리이다. 작가 톨스토이나 파스쩨르나크도 즐겨 사용한 소재이다. (안나카레니나나 닥터 지바고 등의 작품) 기차는 우연과 운명을 이어주기도 하며 미지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인간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오마주이기도 하다.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향하는 영화 속 현재인물,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공간에서 만나는 새롭지만 오래된 ‘과거인물’들과 마주한다. 과거 포르투갈 독재 정치 시절을 배경으로 했던 레지스탕스 주인공들의 삶을 의도적으로 찾아가며 자신의 삶에 대한 변화를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다”라는 아마데우 프라두(잭 휴스턴 역)의 묘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의 과거인물들은 열망과 자유와 변화를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고루한 일상을 살아내고 견뎌내왔던 ‘그레고리우스’에게 리스본의 며칠은 마법과 같은 경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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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화와 드라마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위적이고 그런 작품은 훌륭하지 않을 수 없다.” 를 주장하는 ‘문학도’라서, 원작품에 필름의 색을 입혔을 때, 원작의 영감과 감동이 덜 반영된 것들을 자주 목격한 터, 그래서 이 역시 소설보다 덜하겠지, 했다. 그러나 영화 ‘리스본행야간열차’는 원작 보다 훌륭했다. 정말로, 정말로 그러했다. 적어도 눈은 황홀했으니.

리스본은 가보지 못했지만, 필름에서 본 리스본은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아름답고 고상했으며 사소한 이야기마저도 귀여운 소문이 될 법한 조용한 곳이었다. 영화는 리스본의 지붕과 건물 몇 개의 피사체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아래 세 번째는 아마데우 프라두와 스테파니아가 새로운 삶을 위해 갔으나 헤어짐을 말했던 아이러니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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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 속에서는 대사가 없어도 관객이 스스로 작품과 대화하기 때문에 매 장면이 수다스럽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입체적이고 시끄럽다. 적어도 보는이에겐. 그렇게 ‘리스본행야간열차’는 내게 삶과 인생에 대한 수다를 다시 하도록 재촉하며 달렸다. 그대, 다시 시끄럽고 즐거운 인생을 열망토록.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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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안나카레리나의 애피그라피로 이렇게 썼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게 불행하다’

안나 카레리나는 기만과 허위라는 단어와 가장 자주 마주친다. 사람에게 어떤 삶이 진짜 필요한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브론스키를 사랑했지만 그 끝은 기만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던 죽음 뿐이었다. 그의 삶이 과연 옳기만 한 것인가? 솔직함과 삶에 대한 ‘진리’적 잣대는 과연 양립 가능한가.
안나를 보면서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에 무조건적인 동의를 할 수 없던 불편한 독자. 그게 나였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기만과 허위로 가득찬 삶 속에서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래서 불행한 가정에선 욕망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잘못된 열정과 사랑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양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러시아 거장들, 삶을 말하다’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본다. 문학 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의 중심 구성 요소인 모티프나 테마는 무엇일까? 모티프는 말 그대로 동기 혹은 동인일 텐데, 동기나 동인은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테마는 주제라고도 하는데 흔히 떠올리듯이 교훈과 같은 것이 곧 주제일까? 그렇다면 문학 작품은 교훈서란 말인가? 아니다. 설혹 문학 작품의 주제가 교훈적이고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격언이나 규율처럼 강요되지 않는다. 그러한 주제의 가치는 독자에 의해 체험돼야 한다. 그것이 예술에서 주제가 실천되는 방식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품에서 빈번하게 반복하는 요소이고, 테마는 여러 모티프들을 모으는 핵심 모티브다. 그러니까 테마나 모티프는 정리된 명제로 독자에게 제시되지 않고 인물들의 생활과 환경을 통해서 은근하게 체험되고 느껴지다가 점차 뚜렷해져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쉽게 알기 위해서 [안나 카레니나]의 테마를 미리 말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이다. 그러니까 작품 처음에 가장 자주 나오는 기만이나 허위는 <>의 테마, 즉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핵심 모티프에 긴밀하게 연결되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익숙한 모든 것을 언제나 낯설게 바라보며 작품을 쓴다. 그것이 창의성의 바탕이 되었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예술론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예술의 임무는 논리적인 형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을 이해하게 하고 또 접근하게 하는 데 있다. 진정한 예술적인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감지할 때 나온다. 이후 러시아의 문예학자 빅토르 시클롭스키는 톨스토이를 예로 들면서 문학과 예술에서 근본이 되는 기법이 ‘낯설게 하기’라고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예술의 창의성이 바로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면서 성찰하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후부터 ‘낯설게 하기’는 현재까지 모든 예술 이론들이 기반으로 삼는 가장 중요한 예술 원리로 다뤄지고 있다. 톨스토이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여 인정하는 윤리를 세우고, 또 그것이 자연스러운 본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진실은 역설적이다. 이성으로 내린 똑바른 결론은 그르고, 경험으로 내린 어리석은 결론은 올바르다”라고 했다. 낯설게 바라보는 직접 체험과 체득에 기반한 깨우침을 믿었다.

함께 첨부된 사진은 이반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이다. 십년 전 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를 할 때 머물렀던 하숙집 벽에 저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땐 몰랐다. 그저 푸른색의 여인이 걱정스럽게 무서웠다. 나는 그림 속 여자의 시선에 조금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녀가 안나였다. 톨스토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끄람스꼬이가 그린 안나가 자살하러 가던 기차역으로 가던 마지막 날의 모습이라 한다. 예술 작품의 해석은 분명 독자의 몫이다. 그런듯 언제의 안나든지 그녀의 눈빛에 감화되는 사실, 그 느낌의 흔적을 따라간다. 기만과 허위로 가득찬 세상을 관조하는 한 인간의 눈.

안나의 올케, 돌리가 안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사랑에 관한 말이었다. 현대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다. 그것을 톨스토이가 19세기에 썼다.
“나는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언제나 너를 사랑해. 글쎄, 사랑한다면 그 사람 전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 이것저것 주문한 게 절대 아니거든”

그래서 진실한 사랑은 욕망과 기만과 허위와는 거리가 멀다. 안나가 그토록 바랐던 진실한 그것은 순수한 열정과 딱, 그만큼인 사랑,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플라톤,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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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독서였던,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서 썼던 포스팅을 블로그에서 옮겨와본다.

요즘은 플라톤 향연-사랑에 관하여를 읽는다

직면한 문제를 이성적 분석을 통한 객관적 방법론으로의 해결을 우선으로 한다는 문장이 있다.

문제는 너와 나를 구분 짓는 것 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나와 너의 감정을 존중하는 데 부터 시작했다

언제나 언어를 말할 때 나는 ‘나’임을 강조한다.

하여 글에서 드러나고 말에서 드러나고 심지어 행동에서도 내가 살아 있다.

그리고 그런 나는 ‘너’도 존중한다. 항상 존중의 지나침이 과하여 나와 너는 분열을 일으킨다.

끝내 너와 내가 분리되어야만 각자의 영역에 침범치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나는 너의 감정을 존중하고, 너의 영역에 나의 감정을 투영시키지 않는다

나는 오롯이 나의 감정으로 존재하고 내 감정은 그것의 영역에만 있을 수 있다.

너와 너의 것 역시 그렇다.

보통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내 영역에 갇혀 나의 감정을 읽어달라고 네게 말한다

그러나 온전히 네 영역의 네 감정으로 나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영역을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둘의 교감을 위해선.

사이, 시선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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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노래

[추천 글]

시란 무엇인가? 박소진의 시편은 ‘말’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언어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고 대면하는 주체의 깊은 고독이 고요한 외침처럼 들려온다. 삶을 향한 열망과 좌절로 가득한 자유로운 꿈의 언어들이 조용히 몸으로 들어온다. 말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은 아름답다. 박소진의 세계 속에는 번민과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편들이 꿈틀거린다. “경계에 닿아 부서지는 물방울은/제 삶을 끝내는 찰나/몸의 파편을 공중에 무겁게 뿌린다/잎사귀에 부딪히고/모래 틈으로 들어가고/누군가의 우산에 닿아/소멸의 소음을 탄다”(「비를 보는 풍경의 진화」).

―최서진(시인 · 문학박사)

[약력]

박소진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다. 우크라이나 해외 법인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2010년 전국문예창작공모대회에서 시 부문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공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모두의 교육 나눔터 뚜에듀(toutedu.com)를 운영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E-mail : etroyj@naver.com

블로그 : http://etroyj.blog.me

[시인의 말]

누군가 와서

물속으로

돌을 던졌다

수면이 열렸던 때

파문이 일렁인 곳

[시집 속으로]

엄마를 떠나온 어느 날은 시리게 따뜻했다

몇 안 되는 세간을 들인 날,

남루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섬김의 절을 하였다

천천히 여자의 품으로 가라앉았다

새로이 만난 엄마와 가을을 지낸다

이건 벌개미취, 이건 들국화

몇 번의 발자국을 하늘 아래 찍어본다

서로 부둥켜 하얀 들판을 걷고

차가워진 팔을 겹쳐 안는다

하얀 발자국은 아직 마르지 않아

제 어미가 그리워 우는 여자를 달래어

저린 젖가슴 위로 입김을 불어넣어 본다

가늠 없이 겹쳐 안은 팔 사이로

따뜻한 눈물이 여자를 적시며 내린다

―「동행」 전문

[해설 중에서]

살아가는 일은 먼 곳에 존재해 있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모르는 근심처럼, 자신의 몸을 매일 낯설게 만드는 일이다. 옆구리에서 자주 울음이 새는 일이다. 그렇게, 삶과 어둠과 시간은 지나간다. 팔베개 같은 봄밤과 초콜릿처럼 녹는 밤은 다가오고, 지나가리라. 오욕을 견디느라 입술이 온통 헐은 채 지나가는 밤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모든 삶의 시간들은 내가 다 불러들인 세계임을 인지해야 한다. “청춘의 발로로/그 어떤 곳에서도 반짝반짝 빛날 거라던/가슴의 찬 열정으로 도착했던/그때, 그날/파리에서 서쪽으로 옹플레르”(「파리에서 서쪽으로, 옹플레르」)에서 청춘의 싱싱한 날갯짓으로 박소진의 세계는 호기심으로 빛이 난다. “밖에라도 나가보려고/움츠린 발가락 몇 번 펴보고/신던 신발 가지런히 놓으니/울렁대는 초록빛이 가슴을 친다/하늘빛 쪽빛이라/하늘도 따뜻함을 품고/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포용에/알몸으로 거리를 나”(「햇살 좋은 날이 항상 따뜻하지만은 않다」)가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항상 따뜻하지만은 않으므로 시인은 그 시간으로 자주 열병을 앓게 된다. 시적 주체는 세상에 없는 보물섬을 상상하고 노래한다. 매혹적인 시간들은 꽃나무를 심어놓고 자라게 한다. 그 나무는 푸른 하늘을 만지며 새들의 쉼터가 되게 해주었으며 이미 사라진 시간들로 인해 흔들리기도 한다. “나를 지나/큰 벽을 가로지르자/거기/앉은/고요한 소/란 가득/말 없는 말”(「그림자놀이」)이라는 문장이 뇌리에 얼룩처럼 남아 있다. 스스로 허공이 되어 소란 가득한 말들을 삼킨다. 길목에 핀 장미꽃처럼 유일해진다. 가득해진다. 드디어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 길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얼룩 같은 것 말이다. ―최서진(시인 · 문학박사)

[차례]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낯익은 언어

몸의 직관

나의 언어

정동길

겨울을 보낸 너의 안부

딸기 꽃

바람을 부르는 소리

신부에게

에로토포비아

그해, 오늘

환청

성북동 불빛

빈 밤

냉이 캐기

지루하다 찬란하다

동행

제2부 사이-클

시대의 우울

굿바이 키치

어항

시듦에 대하여

Le mal du pays

비를 보는 풍경의 진화

균열

나는 인문학을 했다

어른은 동화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네에 앉아 발을 구른 어느 오후

시도 : 체스

사이

제3부 러시아 답신

골목길 저기서 일어나는 일

샤먼

루살까

안나 카레니나에 부쳐

기상

섬 정류장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

신경질이 박힌 가시

하루의 우연

지성의 정원

파리에서 서쪽으로, 옹플레르

어떤 것에 관한 표상

레닌의 초상

에르미타쉬 광장

제4부 모든 방

그 사랑

베르니사주

나는 너의

팔월의 한낮은 청춘과 닮았다

Distance

햇살 좋은 날이 항상 따뜻하지만은 않다

같은 언어의 방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구나 겪는 착시현상

Collection

인식의 나체

젊은 시

그림자놀이

해설 | 동행, 저 꽃나무 사이에게

    | 최서진(시인 · 문학박사)

박소진 시집/ 사이, 시선의 간극/ 문학(시)/ 국판/ 142쪽/ 2014년 1월 20일 출간/ 정가 8,000원

ISBN 978-89-98096-62-5 03810/ 바코드 9788998096625

펴낸 곳 문학의전당

편집실 주소 (121-718) 서울시 마포구 공덕2동 404 풍림VIP빌딩 413호

전화 02-852-1977 팩스 02-852-1978

이메일 sbpoem@naver.com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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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고 시작하는 시(수선화에게, 정호승) 를 만나면서 정호승이라는 시인을 읽게 되었다

시를 읽는 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람들은 시 대신 에세이나 소설을 읽는데 익숙해져있다. 소설이나 에세이가 시보다 부담없이 읽히는 이유는 작가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읽기에 큰 어려움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면 시는 작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시의 의미를 알기 힘들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를 알면 시에 숨겨진 뜻을 발견해 시를 곱씹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어, 서술어, 목적어로 야무지게 구성된 완문을 한 단어 혹은 한 어절로 압축하는 작업의 완성, 시. 그래서 시에는 꽃이 피기 전의 설레임과 완성도가 있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움의 시인이며 사람을 대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읽기 수월하고 그의 단어는 사랑, 외로움, 슬픔, 걱정, 기쁨 등의 모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모든 사람은 외롭다. 그러니 외로우니 사람이란다. 시선집 시작의 장에 시인의 말을 빌었다. “잘 가라. 고통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시도 인간적인 것이겠지” 그렇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사람들은 서툴다. 그 점을 그의 시가 대신해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는 “나는 영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생략된 부제가 붙었있다.

영혼이 없다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 작가의 말을 감안할 때, 이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 사랑하는 것 중 하나는 ‘시’이고, 그 ‘시’에는 영혼이 스며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시선집은 /사랑한다… / 별들은 따뜻하다 / 슬픔이 기쁨에게…/ 라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총 100 편이 넘는 시로 구성되어있다.

첫 번째 사랑한다 부분에 있는 시들에는 그리움, 사랑, 떠남, 만남, 외로움 등의 다소 격정적인 슬픔이 스며있다. 시의 언어로 녹이기엔 다소 거친 이미지를 보여준다. 비유나 은유 등으로 꾸미지 않았다. 굉장히 감정적인 시들이다. 그래서 독자에 따라 쉽게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pp. 15, ‘새벽편지’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pp.14 ‘미안하다’

두번째 챕터 ‘별들은 따뜻하다’ 의 시들은 처음의 그것에 비해 좀 더 따뜻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다.

첫번째 챕터의 시들이 나와 너의 사이의 감정들을 건드렸다면, 두 번째는 나와 너의 이야기 보다 내가 보는 제 3자의 존재와 나와의 교감에 초점을 맞췄다. ‘우리’와 ‘삶’이라는 영역을 건드리고 자연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작가의 생각이 은유로 투영되어 있다. 하여 독자에겐 첫 번째 챕터보다 두 번째의 시들이 좀 더 난해하게 읽힐 것이다.

꽝꽝 언 겨울강이

왜 밤마다 쩡쩡 울음소리를 내는지

너희는 아느냐

별들도 잠들지 못하고

왜 끝내는 겨울강을 따라 울고야 마는지

너희는 아느냐

산 채로 인간의 초고추장에 듬뿍 찍혀 먹힌

어린 빙어들이 너무 불쌍해

겨울강이 참다 참다 끝내는

터뜨린 울음인 줄을

pp.60 “겨울강”

시인의 먹먹한 마음은 세 번째 챕터에서 회한의 감정으로 마무리된다. 종교로 위안받으려 하는 의도가 많이 담겨있다.

기도, 예수를 언급한 시어와 시구 곳곳에서 아가페적 사랑 등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주절주절 하고싶은 말을 시어 압축이 아닌 산문으로 풀어 놓는다.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pp.88, “서울의 예수”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첫 번째 챕터 에 속한 “새벽편지” 시가 여기 세 번째 챕터에도 같은 제목으로 한 편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선집의 마지막 시이기도 하다.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죄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하늘의 몫이므로

자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있다.

pp. 116, “새벽편지 ”

인간의 모든 감정을 알지 못해 생기는 괴로움, 죄악.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희생의 시도로 마무리되는 그의 시선집의 시들. 우리는 외로움을 빌어 내 감정을 타인으로부터 위로받고자 하고, 기쁨의 감정에 미쳐 타인을 보지 못한다. 모든 인간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음을 아는 우리는 그리움에 목마르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올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 근원적인 욕망을 건드린 의 시들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모든 노래의 소재가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라는 시를 좋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선화에게’ 만큼 좋아하게 된 시를 소개하며 서평을 마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봄길, 정호승, , 열림원, 2003

안똔체홉,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진_016_etroyj

단연 체홉은 최고의 단편소설가다. 단문에 강하고 몇 문장으로 이미지를 완성시킨다. 노어 원문이면 고작 A4 용지 2장 반의 분량으로 단편 하나는 뚝딱 읽을 수 있다. 분량이 적다고 내용이 빨리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히 기억되는 아이러니한 경우가 체홉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낯설지않다. 찰나와 영원의 매칭은 참 모순되나 한번 그것이 가능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파장은 겉잡을 수 없는 감동이다. 체홉의 글이 바로 그렇다. 요즘 우리는 얼마나 ‘소소함’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블로그나 미니홈피, 라디오 사연, 에세이 등에서 다루는 소재는 ‘소소한 우리의 이야기’이다. 소소함이라는 거창하지 않은 단어를 빌려 평범한 우리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그것은 분명 우리의 전형이다. 소소한 평범, 그러나 온전히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사건에 열광하는 우리의 요즘. 체홉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는 그런 우리가 열광하는 ‘소소한 일상에서 얻는 깨달음’이 녹아있다.

체홉은 러시아작가이다. 고전문학 중에 특히, 러시아문학을 읽어본 독자라면 쉽게 읽히지 않고, 쉽게 끝낼 수 없다라는 데 공감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 체홉의 소설읽기의 차이는 쉽게 끝낼 수 없는 것은 같으나, 체홉의 그것은 쉽게 읽힌다는 데에 있다. 여운은 오래가고 접근도 쉽다. 그래서 비단 러시아뿐만이 아닌 전세계의 독자가 쉽게 체홉의 단문에 열광하는 것이다. 모든 영화와 연극의 동기는 소설이다. 우리가 한번쯤 들어봤을만한 ‘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 ‘바냐아저씨’ 제목의 연극 시나리오의 원작가가 바로 체홉이다. 러시아에서 남녀간의 ‘제대로된 애정묘사’를 처음 시도한 작가도 체홉이다. 하찮은 것에서 의미를 찾는 작가, 체홉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체홉의 여러 단편중 하나이며, 열린책들에서 출판된 체홉소설선집의 대표작으로 선정되어 제목으로 쓰였다. 이 책안에는 17편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 모든 이야기 안에는 슬픔, 절망, 애환, 증오, 갈망, 그리움 등 인간의 모든 일그러진 감정이 스며들어있다. 그 중 첫 번째로 ‘애수’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는 번역본으로 총 여섯 페이지 반 정도의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얼마전 아들을 잃은 마부다. 마부는 승객에게 열병으로 인한 아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리다 욕설을 듣고 맞기까지 한다. 시끄럽다는 것이다. 마부는 더욱더 가슴이 먹먹해진다. 러시아의 추위에, 아들이 죽어버린 절망에 몸은 더 움츠려들고 어떻게 마차를 목적지로 이끌었는지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의식없이 일을 마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인 이오나에게 속삭인다.

” 건초를 먹니?”

“그래, 그래, 너는 아니… 꼬지마 이오니치는 이젠 없어( 아들의 이름) … 이 세상을 떠나버렸지… 허무하게 떠나버렸다고…

만일 말이다. 너에게 새끼가, 네가 낳은 새끼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다. 그 새끼가 죽었다면 말이다…

얼마나 괴롭겠니..?” 늙은 말이 건초를 먹으며,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의 손에 입김을 내 뿜는다…..

이오나가 아주 열심히 말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pp31 : 5 ~ 16, 개를데리고다니는부인 중 , 열린책들

‘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며, 사람들을 보면서, 고독한 감정이 차츰차츰 가슴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낀다.’pp.28 :13

‘잠시 잠잠했던 애수가 다시 살아나 아주 강하게 가슴에 밀어닥친다…..애수는 그 끝을 알 수 없이 거대하다. 이오나의 (마부) 가슴을 찢고 그 애수를 밖으로 쏟아 낸다면 아마도 온 세상이 잠길 테지만, 그렇지만 그 애수는 보이지 않는다. 애수는 밝은 대낮에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껍질 속에 자리 잡고 있다. pp.29: 15 ~22

‘혼자 있을 때는 아들을 생각할 수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해야 한다. 혼자서 아들을 생각하고 아들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pp. 31:2~4

아들을 잃은 마부의 슬픔에 대해 공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체홉의 소설의 감동은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것이 아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고 있다라는 데에 있다. 모든 사람에게 뚜렷이 존재하는 애수를 마부의 이야기를 빌어 세상에 꺼내놓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 가슴에 먹먹한 일들 하나씩 가두고 산다. 말하지 않아 ‘홧병’ 나는 일들. 다른 사람들에게 외로움을 구걸하기 싫어 혹은 약해보이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위로따윈 필요없다는 생각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는 애수를 마음에 담아둔다. 마부 이오나 처럼, ‘누군가와는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의 애수를 말이다. 소소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별 후에 펑펑 울거나, 커피 한 잔 놓고 친구와의 끊임없는 수다를 떤다거나 폭식을 하거나 잠을 잔다는 것 따위로.. 우리는 그 ‘누군가’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애수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Atelier-Liter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