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책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했던 긴 호흡의

강의 기록을 시작해보고자.

 

 

어린이문예창작교실, 문학을 통한 셀프멘토링 두 강의의 강의록을 다시 꺼내보고 엮어서 책으로 낼 생각이다.
틈틈히 하는 작업이 삶을 그토록 활기차게 할 터.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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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학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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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apply.kpipa.or.kr/front/main.act

사이, 시선의 간극 / 2014

내 시집이 2014년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학도서

세종도서로 선정되었다.

사람들은 시집을 사서 보지 않지만 늘 시를 마음에 품고 산다.

바넷뉴먼, 그리고 숭고

내가 관심 갖는 미학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포스팅해볼까 한다.

대학원 미학 수업에서 발제한 페이퍼 중 일부를 이곳에 옮겨 놓는다.

Barnett Newman

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뉴먼의 작품 안에는 알아볼 만한 대상도 없고, 그 이전에 어떤 형체도 없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형식요소들의 유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몇 개의 수직 혹은 수평선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색면. 그게 전부다. 아름다운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추한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이 매개하는 체험은 ‘미’나 ‘추’라는 범주로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리라.

슬라이드1

그림 앞에 선 관찰자의 체험 혹은 느낌, 지금-여기, 바로 거기에서 그림은 작품으로 성립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초인적 무한성과 인간의 무력함이 강조되었고, 이것이 숭고의 경험과 결부되었다. 작품 속에서 자연히 숭고의 경험을 소재로 다루었다. 이에 반하여 뉴먼은 작품 자체가 직접 숭고한 체험을 유발하도록 의도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거대한 추상회화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 리오타르는 낭만주의 미술이 “The sublime is like this” 라고 제시하는데 반해 뉴먼은 “The sublime is now”으로 제시 즉,전자에 있어서는 작품 속에서 숭고의 경험이 일어나고 있지만, 뉴먼에 있어서는 숭고의 경험은 작품을 대면한 순간 관람자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

슬라이드2

① “The sublime is now”
 어떻게 그릴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 뉴먼에게 있어 ‘숭고’는 대상에 속한 속성이 아니라 주체의 체험 속에 있었다.
 재현적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인 형상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숭고’란 인간을 위협하는 상황을 극복하려는 자아 의지

② Zip, scale, color
 관람자에게 자연 대신 회화라는 인위적 사물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의 경험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아 의식, 즉 ‘숭고’를 체험하게 하고자 하였던 그의 의도

③ 대상(object)보다 주제(subject)
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실재 (spiritual reality) ‘숭고 (the sublime) ’를 표현하는 것

  1. 뉴먼에 있어서 숭고의 의미

1) 새로운 미술에의 요구 : 추상표현주의

 1940, 50년대의 세계, 전쟁과 대공황 후의 불안과 회의로 인한 사회적 위기, 기존의 가치기준에 관한 회의주의의 팽배.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미술 경향 : 추상표현주의
 추상표현주의 :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주로 드러남
 “외부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린 것
 형태를 위한 형태에 안주하지 않고 실존적 내용을 전달하는 예술을 창조하고자 함
 뉴먼은 “두렵고 끝없는 자아야말로 자신의 회화의 주제” 라고 밝힘

2) “이제 숭고가 도래하였다”
 르네상스에 이르러 그리스의 이상적 미가 계승됨으로써 미가 숭고의 대립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미켈란젤로만이 숭고를 이해하고 그것의 기준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세워놓은 숭고는 현상미를 추구했던 작가들에 의해 단절되어,인상주의자들이 붓자국들로 뒤덮인 표면을 고집함으로써 미에 대한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자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뉴먼은 빛을 포착하고자 하는 인상주의의 충동을 미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해했고, 인상주의자들은 미를 숭고로 대체하지 못하고 조형적 형식에만 몰두했다고 주장함. 초현실주의 미술은 무의식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숭고와 관련됨

3) 근원 : 원시미술

 뉴먼의 작품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은 쿠와키틀 인디언의 미술을 주축으로 한 원시미술.
 원시미술에서 가장 강렬하고 솔직한 감정인 공포를 표현하는 것에 주목, 쿠와키틀 인디언 미술의 추상적 형태가 복잡한 추상적 사고를 전달하는 것이며 미지의 것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라고 이해함. 따라서 그 형태를 단지 형식적 추상화로 보기보다는 추상적 사고와 연관시킴. 즉, 추상적인 사고를 드러내는 미술은 의미있고 상징적인 것을 뜻함

 뉴먼에 따르면 원시인들은 자연에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공포를 느꼈음. 그리고 공포는 원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작품 속에서 철학적 접근을 가능케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생활 목적이 아니라 공포의 감정을 자아내는 삶의 근원적인 미스터리에 관한 것이었음

4) “최초의 인간은 예술가였다” (1947)
“인간의 첫 꿈처럼 그의 첫 번째 표현은 미학적인 것이었다. 말은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시적인 외침이었다. 태초의 인간은 허공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해 분노와 경외를 외쳤던 것이다- 인간의 첫 마디는 미지의 것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행동은 그의 예술적 본성에 그 기원을 둔 것이다”

 뉴먼은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깨닫고 인간의 고통이라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주제에 관심을 둠
 객관적 미 보다는 인간의 자아경험을 추구하게 된 것
 이것을 미와는 대치되는 숭고로 명명
 뉴먼에게 숭고란 보편적인 삶의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이를 극복하려는 정신
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는 자아경험, 작품이 매개하는 체험을 다루고자 하였음
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비극적 상황 속에서 예술가는 제작 행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며 이를 보편화시키고자 함
 칸트가 언급한 바 있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대상 앞에서 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심의상태와 유사한 것으로 인간의 의지라는 점에서 숭고와 연관.

  1. 숭고를 표현하기 위한 뉴먼의 조형적 요소

리오타르 : 숭고는 말해질 수 없는 것 혹은 현시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뉴먼이 작품이 제시한 순간 그 장소에서 숭고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저기에, 다른 세계에,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 관람자의 자의식을 유발하기 위해 뉴먼은 대면하는 순간 파악되는 전체성을 특성으로 하는 단일 형상을 제시함

1) Zip
 “이제 숭고가 도래하였다”라는 글을 발표했던 1948년, 뉴먼은 ( 그림 1)을 통해서 전환을 보여준다. 그는 1948년 자신의 생일에 캔버스의 중앙에 수직선을 그렸다. 이것이 그의 예술적 방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그림 1) 이다. 은 결코 외부 자연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작가 자신의 회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어떤 환경도,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처음으로 내가 했던 것과 대면했다는 것이다 ”

 뉴먼은 자신의 독립적이며 근원적 (plasrnic)사고에 대한 조형적 (plastic) 형태를 발견한 것
 수직띠는 직립한 인간에 대한 의식을 일으킨다는 점
 관람자가 그곳에 존재함을 인식하게 하는 것
 수직선의 강렬함이 우리가 거기에 서 있다라는 감각을 가중시킴
 관람자에게 뉴먼의 회화의 목적인 개인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함

 (그림 2)
의 4개의 띠는 좌우양측 가장자리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대칭을 이룬다. 또한 동일한 면적의 사각형이 화면좌우에 대칭적으로 나타남으로써 형상과 배경의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 뉴먼의 띠는 최소한의 수단을 사용하여 관람자가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게 함으로써 주관세계로 침잠하게 하는 요소로서 사용되었으며 결국 관람자의 “현존(presence)”을 자각하게 하는 것

2) Scale (거대한 규모)
 뉴먼의 작품 (그림 3)은 세로 9피트, 가로 20피트의 빨간색 색면으로 된 거대한 작품이다. 그의 화변에서는 형태마저도 억제되어 그 규모는 더욱 강조된다. 따라서 관람자는 자신과 캔버스의 대면이라는 것 자체에 주의가 집중된다.
 뉴먼이 거대한 규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9년 오하이오 인디언 무덤에서의 체험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 무한한 공간 속에서 중심(focus)으로서의 자신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함
 “네가 느끼는 그 장소를 바라보면서 나는 여기 있다. 여기에 … 그리고 저 너머에는 혼돈, 자연, 강, 풍경이 있다 … 그러나 여기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 나는 관람자를 현존하게 만드는 관념(Idea) 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존재한다’라는 생각 말이다”
 뉴먼은 거대한 작품 앞에서 관람자 자신의 현존성에 대한 자의식을 유발하는 데 몰두. 화면의 전체성을 통하여 자신이 의도하는 주제를 관람자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함

3) Color

 외부로 확산하는 힘이 내재된 색채의 강렬함은 숭고를 경험하기 위한 요소로 작용. 색채 자체가 지닌 심리적 효과를 이용한 숭고의 체험.
 거대한 캔버스에 채색된 뉴먼의 색채는 그림이라는 틀내에 제한되지 않고 캔버스를 넘어서 확장되는 것으로까지 여겨짐. 그리하여 관람자를 일상의 삶에서 분리시키고 초월적 경지로 이끈다. 관람자의 시각적 경험 이상의 효과, 즉 내적 감수성에 작용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
 내적 정신의 전달체
 뉴먼은 모든 재현적 의도에서 벗어난 순수한 색채 자체의 표현적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뉴먼이 빨강, 노랑, 파랑이라는 기본색을 표현적 의도로 사용한 전형적인 예는
(그림 4) 연작이다. 그의 의도는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내가 색채가 기본색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도그마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같은 색채들을 사용하려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동기를 설정하였다. 즉,색채를 교훈적이기 보다는 표현적으로 만들고 그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 사람들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 붉은 색은 칸딘스키가 제시했듯이 지극히 활력적인 색채로 보는 이에게 동요를 일으킨다. 또한 외부로 향하지 않고 주로 내부에서 작열하는 색채로 힘,에너지,지향성,결단성, 승리와 기쁨 등을 상징하는 영웅의 색인 것이다. 빨간색은 자극을 유발하여 불안과 긴장을 증가시키기까지 한다. 색채학자 파버 비렌(Farber Birren) 에 의하면 문명을 형성한 초기의 인간부터 청색은 영혼을, 노란색은 마음을 의미하는 한편 붉은색은 육체를 의미하는 색이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의 피가 붉은색이라는 사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뉴먼도 이 같은 사실을 반영하듯 ‘아담’ ‘얘브’ 그리고 ‘영웅’과 같이 인간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

  1. 숭고와 뉴먼, 뉴먼과 숭고

 1948년 그의 “이제 숭고가 도래하였다” 글에서 “아름다운 것보다는 신비로운 숭고” 를 주제로 설정하고 작품을 통해서 이를 실현하고자 함.
 뉴먼이 주제로 다룬 숭고는 미와 구분되는 개념으로서 주제로 설정한 숭고란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절망의 시대를 거쳐 살아남은 인간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 뉴먼의 회화에 있어서 주제란 바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보편적인 고통 앞에서 이를 극복하는 존재의 숭고함이었던 것.
 내면세계로 몰입하여 실존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경향.
 화면은 지극히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에 접근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오한 주제의식을 함축함. 작품을 단일한 총체로 제시하는 전체성을 지님. 관람자에게 자신의 현존을 확인하는 숭고한 체험을 유발하게 됨

자아로의 데미안 (10.7, 10.14일 강의)

내게 헤세의 데미안은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 어떤 책보다 중심을 가르쳐 준 나의 넘버원.

데미안으로 강의를 곳곳에서 하는데도
늘 새롭다. 타자는 늘 다르고, 지금-여기의 상황도 늘 다르니까
순간, 맞닥뜨린 작품 자체는 항상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한다.
체험 이후에는, 대면 이후에 얻는 질문은 특정 의지를 낳게 함을 믿는다
데미안은 내게도, 타자에게도 그렇다.

10월 7일과 14일에는 데미안을 읽었다.
수업 중, 사이에 떠돌던 공기가 몰입으로 침잠하더니
그 속에서 반짝이는 의지로 변화해 부유했다.

나의 세계에는 어떤 파편이 있는가.
데미안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나의 알은 깨질 수 있는가, 혹은 그럴 수 없는가.
등의 이야기.

그렇게 조금씩 화요일의 문학셀프멘토링에 함께하시는 분들은
날개를 갖고 알을 깨며 자신의 신에게로 날아간다
이제 나는 여기에 조금 더 큰 날개를 달아 많은 곳에서 쓰임 받기를 기도한다.

변화

셀프3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8월부터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의 열정에 오히려 감사하다.
화요일 진행하는 문학 셀프멘토링 수업에
한 주 결석에도 그렇게 안타까워 하시고
오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 하셨다 하시고
“선생님을 만나서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라고 최고의 칭찬을 해주신다.

나는 얼마나 작은가.
대신 희망은 컸다.
내가 타자의 삶에 조금이라도 새로운 생기가 되길 바랐었다.
문학이, 나의 강의 컨텐츠가 그런 ‘존재’로 남기를.

이제 반 정도 달려온 지금
나와 함께 하는 화요일의 ‘우리들’은 나의 강의목표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여기’에서 하고 싶은 것을 적기 시작했고,
내 안의 나를 진짜 나라는 존재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나를 사는 나를 발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하고 싶던 무언가와 이루고 싶던 꿈과 새롭게 생기게 된 오래지 않을 미래의 꿈을
바로 보기 시작했다.

조금씩 달라지는 그들의 변화가 눈에 비친다.
이게 내가 문학하는 이유이다.
우리네 삶의 총체에서 나는 파편에 불과하나,
그 파편의 전체를 전제하므로 우리들의 총체에 파문을 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들 편에 서 응원한다.
그분들이 내게 고마워하고 감사하다,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주실 때마다 나 역시 ‘지금-여기’에서 나로서 바로 선다.

열어두고 멀리 보는 이유

호퍼

내가 하는 학문과 근근히 하고 있는 강의는 절대 작품에 대한 독자의 판단을 규정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절대로 이 작품은 이러 이러한 특징과 주제, 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라고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에룬다. 쓰레기다. 대한민국에 그렇게 강의하는 강사분들이 많으니까. 그분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문학은. ‘자아’가 사유하는 것으로 (욕망 덩어리인 ‘나’가 사유하는 것이 아닌- 그런 ‘나’는 사유할 수 없다) 그 사유대로 빛을 발하며 자아가 발하는 빛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삶에 대한 절대 기준을 알게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은 분명 되돌려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허영의 전시장에서 쓰이는 명예나 돈, 뭐 그딴게 아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과 자신감이다. 나는 분명 이렇게 믿는다.
때문에 내가 어떤 작품에서 뽑아 온 주제는 이 전체에 대한 것이예요.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폭력이다. 타자에게 작품을 읽을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문학의 상상력을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럴 권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열어두고 멀리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더라.

8, 9월 그리고 10월 첫 주까지의 거창한 이름으로 시작한 강의들이 진실로 내면의 자아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문학의 목적임을 일깨우기 위한 나의 강의가 이제 조금씩 사람을 변하게 하고 있음을 느낀다. ‘내 안의 자아를 만나 변화된 빛’을 발하는 그녀들(강의 참여자)을 보면 그 뿌듯함과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가 벅차다. 날이 지날 수록, 더욱 열심히 참석하는 그네들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 문학이 흐르는 순간이며 온 자아들이 형태 밖에서 춤추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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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작업, 체홉

그냥 읽는 것과
원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며 읽는 것은 다르다.
2014, 가을학기 대학원 수업에선 체홉을 읽는다.

예전 상트의 넵스키, 돔끄니기에서 체홉의 전 작품이 모아져 있는 원서를 샀었다.
그 하드커버의 반짝이는 디자인과 러시아 냄새가 나던 종이의 그 책을 기억한다.
지하철 짐 칸에 두고 내려 영영 찾지 못했다.
멋모르던 학부 시절, 나는 모르고 체홉을 만났고
이제는 좀 알 것 같은 시대에 그를 다시 만난다.

정말 즐겁다.
문학을 하는 것은,
문학을 읽는 것은
그리고 문학을 가슴으로 만나는 것은.

본론으로 들어와 체홉에 대한 짧은 개관은..

시대를 따르지 못한다고 해서 절대 불운한 것은 아니라는 것.

포스트모던 시대에 포스트모던식의 문학을 한다면 그럴 수 있다. 여기서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은 주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포스트모더니즘식의 변형적 사고를 했다면 그것은 Mirski 가 체홉에게 했던 “사상이 없고, 철학적명제도 없다” 라는 아쉬운 비평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체홉은 진정 진실하다. 작가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얼마나 진실했냐면 시중에 나와있는 번역본과 비평서로 알 수 없다. 그의 원문을 직접 읽어야 한다. 강의는 체홉의 원문을 읽는 것을 업으로 한다. 그를 읽어 내려갈 때 만나게 될 그가 기대된다.

문학작품을 대할 때 우리는 머리와 가슴으로 뭔가를 느낀다. 작품으로부터 오는 그 무언가가 보내는 신호에 젖는다. 그것이 문학성과 예술성이다. 체홉이 얼마나 혼자서, 조용히, 울고 있었는가 문학성과 예술성을 세 가지 관점으로 접근해본다. 테마 중심, 구조시학 중심, 미학의 관점으로 살핀다.

관리의 죽음, 뚱뚱이와 홀쭉이, 카멜레온, 휘어진 거울, 농담, 우수를 읽고 나의 고유한 정의를 내려본다.
시점과 성격화에 대해. 그것은 다음 포스팅에…

캡처

마르그리트 뒤라스 강의 (9.30)

9월 30일에 예술가의 집에서 진행했던 9월, 여자 고전을 말하다의 마지막 강의는
뒤라스의 을 통한 ‘나’의 발견이었습니다.

강의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과 무의식과 나 사이
‘사랑’과 ‘끌림’의 사이
‘사이’의 개념
자신이 생각하는 각자의 ‘사이’ 개념
시간, 공간, 관계에 대한 깊고 다양한 ‘사이’의 이야기로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해보자
  1.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랑’과 ‘끌림’이라는 감정에 대한 토론

  2. 여자에 대한 총체적 접근, 그리고 ‘나’

단조로운 ‘한 가정의 엄마’에서 ‘두근거리는 삶’의 떨림을 기대할 수 있기를.

에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인 ‘욕망’의 관점을
내 안의 ‘그녀’ 혹은 ‘나’의 목소리에 대입하여 그것의 정체성을 스스로 탐색했던 시간.
‘나’라는 정체성은 내게 그토록 ‘낯설게’ (안나 카레리나처럼)
‘관계를 통한 타인으로부터 ‘ (쿤데라의 샹탈처럼)
‘자조적 의지로부터’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그리고 내 안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욕망의 그것으로부터 (연인)
여자를 말하고, 엄마를 말하고, 아내를 말하고, 온전한 나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9월 강의까지 마치고 이제 10월의 강의 테마는 ‘멘토’입니다.
내 삶의 멘토로서 나는 자신감있게 우뚝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추가 접수를 도서관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해오름도서관 (서울 성북구) 에 문의주시면 됩니다.
문체부주관, 한국도서관협회 주최 내생애첫작가수업, 문학을 통한 셀프 멘토링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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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함께사라지다, 마거릿미첼 강의 (9.25)

9월 25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강의는
작품 속 ‘스칼렛’의 목소리에 나의 목소리를 대입하는 구성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대부분 참가자가 ‘여자’인 특성이 있어 보다 감성적으로 공감하며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스칼렛의 목소리를 통해 ‘나’, ‘여자인 나’로서의 삶을 거리두기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ㅅ’의 시학에 대한 사유를 제시했습니다.

수업시간에 활용한 영상을 업로드 하려고 했는데,,
이게 왠걸. 워드프레스는 영상을 올리려면 추가로 돈을 내야 하는 사실,,
텀블러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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